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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의 고장 제천 2- 청풍문화재단지

yolo28 2013. 2. 20. 22:57

2013.02.16

청풍 문화재 단지

충주 다목적 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지역이 된 남한강 상류에 있던 유적들을 이전, 복원시켜 조성한 단지.

 

 

 

 

       <팔영루>

 

 

       

<금남루>

청풍부(淸風府)의 아문으로 ‘도호부 절제 아문’이란 현판이 결려있으며, 안쪽에는 '금남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움.

본래 청풍면 읍리 2-3-1번지에 있었으나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명 2칸의 팔작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

 

 

 

<금병헌>

청풍부(淸風府)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 건물.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沙熱伊縣)→신라, 청풍현 →고려, 지군사(知郡事) → 조선 세조, 군(郡) →현종, 도호부(都護府) →고종, 군(郡) →1914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본래 청풍면 읍리 2-3-1번지에 있었으나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 일명 명월정(明月亭)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한벽루>

         앞쪽, 뒤쪽에 '한벽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둥근 기둥과 각이 진 기둥이 있는데 각이 진 기둥이 있는 곳에는 평민이 올라 갈 수 있으나, 둥근 기둥이 있는 곳에는 지체가 높은 양반들만 올라간다.

 

        앞쪽

 

       

     옆면

 

         

      뒤쪽      

 

 

 

<응청각>     유형문화재 제90호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인조 15년(1637)에 충청감사 장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 복원함.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

 건물 좌측에 목조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리게 함.

 

앞쪽에는 '응청각', 뒤쪽에는 '관수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렇게 이름이 여러 개인 경우는......

나라의 높은 분이 오셨을 때 이름을 지어주면 그대로 사용했는데 여러 사람이 지어준 경우는 정자의 이름이 여러 개가 됐다고 함.

 

 

       앞쪽. 현판이 '응청각'

 

 

 

        옆면. 사각형 모양의 공간에는 숯불을 넣어 난방 효과를 냈다고 함.

 

 

       뒤쪽, 현판이 '관수정'

 

 

 

      청풍 문화재 단지에서 바라본 망월산성과 망월정

 

 

       청풍 문화재 단지에서 바라본 청풍호.  청풍 리조트, 레이크 호텔이 보인다.

 

 

 

<청풍 도화리 고가(古家) >   풍산 김씨의 집.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조선 말기의 목조 기와집으로,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1985년에 청풍문화재 단지로 이전 복원되었다.

건물은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뒷면은 1단의 낮은 냇돌 기단을, 앞면은 5-6단의 높은 기단을 구성하여 세운 ‘ㄷ’자형의 집으로 왼쪽에는 방 ․ 부엌 ․ 광이 배치되고,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이, 오른쪽에는 방2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왼쪽은 기단이 단층이고 오른쪽은 2층 기단인 것은 오른쪽에 있는 방이 안방마님이 기거하는 곳이라......

 

 

머름대 : 창문 밑에는 일정한 높이의 머름대를 두어 바닥이 공기의 흐름으로 차갑게 식는 것을 막고, 바닥에 누웠을 때 외부 시선을 차단한다

 

 

 

<청풍 후산리 고가(古家)>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던 민가였다. 충주댐 건설로 1985년에 이곳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기와집.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넌방과 툇마루를 높이하고 그 밑에 함실 아궁이(부넘기가 없이 불길이 그냥 고래로 들어가도록 된 아궁이의 구조)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집채를 뒤쪽으로 이어 놓은 물림)를 후보하여 제사방(祭祀房)으로 꾸미고 있으며,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김씨 시조묘는 자드락 7길에 있다. 시조묘가 2기 있는데 하나는 하인이 시조묘자리가 좋은 것을 엿듣고는 주인 몰래 시조묘 옆에 시조묘와 똑같은 모양으로 자기 조상의 묘를 쓴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청풍김씨 측에서 알게 되었지만 그냥 놔뒀다고 함. (문화해설사의 설명)

 

 

 

<수산 지곡리 고가(古家)>

이집은 본래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민가 주택. 충주댐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 사랑채와의 사이를 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사랑채로 연결하는 판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꾸며져 있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ㅡ자형 초가로 되었다. 이 집의 행랑채의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 있는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 석조여래입상>

청풍대교 입구에 있던 백양사에 모셔져 있던 석조여래입상을 옮겨놓음.

높이 341m.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10세기 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 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 읍리(邑里), 청풍대교 입구에 있던 백양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석물군>

수몰이전 옛 청풍, 수산, 덕산, 한수 지역에 산재되어 온 고대 사회의 장의(葬儀) 풍속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그리고 도호부 시대 군수와 부사의 송덕비, 공덕비, 선정비 32점과 제천향교 경내에 보존하던 역대 관찰사, 현감, 군수의 치적, 공적비 10점 등 총 42점을 이곳에 배치하여 남한강변의 거석문화에 대한 변천과 당시 인물의 공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고인돌과 성혈(星穴)>

고인돌(支石墓)은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괴었던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일종의 무덤 양식.

지역에 따라 조금씩 형태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받침돌 위에 덮개돌이 있는 탁자 모양을 띄고 있다.

이 고인돌군은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황석리 지역에서 옮겨온 남방식 고인돌로 특히 중앙에 배치된 고인돌은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星穴)이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약 2,5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풍화작용에 의해 다른 별자리들은 마모되어 알아 볼 수 없지만 북두칠성과 북극성만은 선명히 남아있다.

 

 

 

 

김중명 (1614, 광해군6 - 1685, 숙종11)

김중명은 청풍 김씨로 자는 이회였다. 아버지 김 전은 병자호란 당시 빙고의 별제 벼슬을 지내던 사람으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문안하려고 급히 가던 길에 청병을 만나 힘껏 싸우다 전사. 그때 중명은 부친의 시신을 메고 양주 금촌까지 가서 장사 지냈다.

김중명은 인조 을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발탁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한 후 성묘 갔던 길에 묘 뒤에 숨어있던 큰 범을 만나게 되었다. 따라온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그 범을 차서 죽여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

 

 

 

       <연자방아와 소에 얽힌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