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제주도

<제주도 여행>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를 만나는, 이중섭 미술관

yolo28 2014. 3. 27. 22:49

2014.02.25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를 만나는, 이중섭 미술관

 

 

행복이 성적 순이 아니 듯,

또한 재물 순도 아님을 말해준 화가, 이중섭.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1.4평밖에 안 되는 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어렵게 피난생활을 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말했다지?

 

문득 누군가가 물었던 우스개소리가 생각났다.

"영국까지 가는데 가장 빨리가는 방법은 뭐야?"

"글쎄~~~."

"사랑하는 사람과 가는 거야."

 

 

 

 

이중섭(1916-1956)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대향(大鄕).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을 가르쳤고 이는 이중섭의 화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은 18세에 학교건물을 새로 짓자는 이유로 오산학교 본관 화학실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자모로 구성을 시도했다. 이무렵 그는 들에 있는 소를 관찰하며 스케치에 열중했고 오산학교를 졸업할 때는 앨범의 서명란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소동을 빚기도 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다. 이때 이정규·김환기·유영국·김병기·문학수 등과 사귀었다. 1938년부터 일본 추상 그룹인 미술창작가협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에는 협회상인 태양상(원명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그해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과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졌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1943년 귀국하여 2년 후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山本方子]와 결혼하여 원산에 정착해 살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 표지그림을 그린 후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뒤 불우아동들의 무료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1950년 겨울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 부두노동을 하며 양담배갑을 모아 은지화를 제작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1차례 건너갔다온 것을 제외하고는 만나지 못했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종군화가로서 몇 차례 단체전에 출품했고 1953년에는 통영에서 유강렬과 함께 지내며 다방에서 40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 진주를 거쳐 상경했고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했다. 서울 누상동에 거주하면서 국방부·대한미술협회(대한미협) 공동주최의 대한미협전에 출품했다. 1955년에는 미도파 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해 7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대구의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치료해 얼마간 호전되었으나 무단으로 퇴원한 후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57년 조각가 차근호 제작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가져옴)

 

 

 

 

 

 

 

1층 상설전시실에는 이중섭의 그림, 답배갑 속에 있는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

이중섭의 부인이 이중섭 화가에게 보낸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을 찍지 않았다.

 

<1층에 있는 소 조각품>

 

 

 

2층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이중섭이 아내(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아고리는 이중섭의 별명.

이중섭의 아내는 이중섭의 유학시절 같은 학교의 후배.

이중섭이 유학할 때 같은 반에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세 명이 있어 헷갈리지 않게 하려고

선생님이 별명을 지어줬는데, 

이중섭의 턱이 발달해 있어 일본말로 턱을 뜻하는 아고(顎/あご)에 이중섭의 성을 붙여

'아고리'라고 불렀단다.

 

 

 

<2층 전시실>

올해가 말의 해이어서인지 말을 주제로 한 <말들의 고향> 전시회가 있다.

 

 

 

 

 

<3층 옥상>

옥상에서는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문섬, 섶섬, 새섬등을 볼 수 있고

이중섭 거리가 내려다 보인다.

 

 

문섬

 

 

 

섶섬

 

 

 

이중섭 거리가 내려다 보인다.

 

 

 

<이중섭 거주지>

 

 

 

 

황소와 아이들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린 이중섭 화가는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이곳 서귀포에 살면서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혼자 누워도 답답할 것 같은 이 조그만 방에서 아내와 두 아들,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벽에 붙어 있는 이중섭 화가의 시 <소의 말>을 적어 붙여놓은 종이는

 5년 전에 갔을 때는 깨끗했었는데,  세월 따라 누렇게 변하고 지워진 곳도 있고......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복두복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 거리>

이중섭 미술관 옆에 있는 이중섭 거리 양쪽에 이중섭 그림 모양을 기둥에 받쳐 세워놓았다.

 

 

 

도원

 

 

 

울부짖는 소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

 

 

 

저울질하는 사람

 

 

 

연꽃밭의 새와 소년

 

 

 

닭과 게

 

 

 

세 사람

 

 

 

 

 

이중섭 거리의 이모 저모

 

 

 

이중섭 미술관 : http://jslee.seogwipo.go.kr 

* 관람시간 : 09:00-18:00(월요일 휴관)

* 관람료: 1,000원.

* 주소 : 서귀포시 이중섭거리 87 /서귀동532-1. 064)733-3555.